경주 안압지가 동궁과 월지로 바뀐 이유, 이름 두 개인 까닭

2026-10-08 · 여행 · 읽는데 9분

경주 안압지가 동궁과 월지로 바뀐 이유, 이름 두 개인 까닭

경주 안압지라고 부르던 곳이 지금은 '동궁과 월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는 분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935년 신라 멸망 이후 폐허가 된 연못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면서 조선 시대 묵객들이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명칭이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에 실리면서 오랫동안 굳어졌습니다. 그런데 1975년 발굴 조사 중 '월지(月池)'라고 새겨진 토기 파편이 나오면서 본래 이름이 확인됐고, 2011년 7월에 공식 명칭이 '경주 동궁과 월지'로 변경됐습니다. 지금도 안내판이나 지도에서 두 이름이 뒤섞여 등장하기 때문에, 검색할 때 양쪽 명칭을 함께 알아두면 혼동이 줄어듭니다.

안압지와 동궁과 월지, 같은 곳인데 이름이 두 개인 이유

이름이 바뀐 핵심 근거는 발굴 성과입니다. 1980년에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 파편을 조사한 결과 신라 시대에 '월지'로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됐고, 이는 신라 왕궁인 반월성(半月城)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임해전의 본래 이름도 월지궁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삼국사기》에는 동궁을 임해전(臨海殿), 즉 바다에 면한 건물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여기서 연못이 바다를 상징한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동궁과 월지 북동쪽에 있는 경주 황룡사지로 가는 도로명이 '임해로'로 명명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 안압지: 조선 초기 문헌에 등장한 명칭, 기러기(雁)와 오리(鴨)에서 유래
  • 월지: 신라 시대 실제 명칭, 1975년 발굴 중 확인
  • 동궁과 월지: 2011년 7월부터 사용 중인 공식 명칭

누가 언제 만들었나 — 조성 시기와 규모

신라 문무왕 14년(674년)에 삼국 통일을 완수한 직후 왕궁의 원지(苑池)로 조성됐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으며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이어 문무왕 19년(679년)에는 동궁을 창건해 별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췄습니다.

규모를 보면 동서 약 200m, 남북 약 180m에 이릅니다. 서쪽과 남쪽은 직선적인 석축을 쌓았고 북쪽과 동쪽은 복잡한 곡선으로 조성한 점이 특징입니다. 이런 설계는 연못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게 해, 실제보다 훨씬 넓은 바다 같은 느낌을 주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누가 언제 만들었나 — 조성 시기와 규모
누가 언제 만들었나 — 조성 시기와 규모
항목 값
조성 시기 문무왕 14년(674)
동궁 창건 문무왕 19년(679)
동서 규모 약 200m
남북 규모 약 180m
섬 개수 3개

연못 안에는 각기 다른 크기의 섬 3개가 배치됐고, 북동쪽으로는 신선 사상을 반영해 도교적인 무산(巫山) 12봉을 상징하는 인공 산을 조성했습니다.

왕건이 초청받았던 자리, 역사의 현장

이곳은 왕위 계승자인 태자가 거처하는 곳이자,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사신을 맞이해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쓰였습니다. 특히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고려 태조 왕건을 초청해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한 건물이었지만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월지는 신라 원지를 대표하는 유적입니다. 이처럼 동궁과 월지는 단순한 정원 유적이 아니라 신라 통일기 왕궁의 핵심 시설로서 정치적 기능까지 겸한 공간이었습니다.

1975년 발굴에서 나온 것들

안압지가 다시 주목받은 것은 1975년입니다. 경주시가 1974년 11월부터 방치된 안압지 정화사업을 시작했고, 같은 해 12월 16일 명문 기와 등 다량의 신라 시대 유물이 드러나면서 본격 발굴로 이어졌습니다. 경주고적발굴단이 1975년 3월 24일부터 발굴을 시작했고, 연못 조사는 1976년 3월 25일까지 만 1년간, 주변 건물지 조사는 1976년 5월 10일부터 그해 12월 30일까지 진행됐습니다.

발굴 당시 월지 바닥에서는 약 3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됐습니다.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調露 二年, 680)'이라는 글자가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졌음을 뒷받침합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신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된 흔적이 확인됐습니다.

  • 선각단화쌍조문금박 등 정교한 금속 공예품
  • 목간, 상아 주사위
  • 완벽한 형태의 수세식 변기 시설

동궁은 정말 서쪽에 있었을까

오랫동안 월지 서편의 대형 건물군이 태자의 거처인 동궁으로 비정돼 왔습니다. 그런데 '동궁'이라는 명칭과 실제 위치가 서쪽이라는 방위가 맞지 않는다는 점이 계속 한계로 지적됐습니다.

최근 발굴 조사를 통해 월지 동방에서 태자의 독립적 거처로 추정되는 새 건물지가 확인되면서 기존 가설이 수정됐습니다. 새로 발견된 유적은 정면 25m, 측면 21.9m 규모의 대형 건물지와 마당, 독립된 원지, 배수 시설을 갖추고 있어 방위와 상징성 면에서 동궁의 요건에 부합합니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는 기존에 동궁으로 알려졌던 월지 서측 건물군을 왕이 직접 사용하거나 국가적 의례를 행하던 상위 위계의 공간으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포함한 삼국 중 태자궁의 실체가 문헌과 고고학적으로 일치해 확인된 유일한 사례가 됐습니다.

발굴조사는 지금도 진행 중

200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동궁과 월지 북동쪽 일대에 대한 중장기 발굴조사 계획을 세운 뒤 조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2년과 2014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 Ⅰ》과 《Ⅱ》가 공개됐고, 2020년에는 《경주 동궁과 월지 Ⅲ》에서 '가'지구 조사 내역이 발표됐습니다.

'가'지구는 약 6,500m² 면적으로, 월지 북동쪽으로 지나가는 동해남부선 철로 북쪽 공간에 해당합니다. 이곳에서 남북 담장을 중심으로 2기의 대형 적심 건물지, 깊이 10m가량의 대형 우물, 창고시설로 추정되는 줄기초 건물지 등이 발굴됐습니다. 크고 작은 건물지 40동과 담장, 우물, 배수로 등이 확인됐고 기와와 벽돌, 토기와 도기, 금속유물 등 591점의 선별된 유물이 보고서에 실렸습니다.

특히 조사구역 남쪽 29호 건물지에서는 화장실 건물 내에 변기시설과 오물 배수시설이 함께 발굴돼 신라 왕궁의 화장실 유구로 확인됐습니다. 고급 석재인 화강암을 가공해 만든 변기시설에 수세식 방식이 쓰였고, 변기 하부와 오물 배수시설 바닥에는 타일 기능의 전돌을 깔아 마감한 점이 확인됐습니다. 같은 형태의 변기형 석조물은 신라에서는 불국사에서, 백제에서는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

발굴조사는 지금도 진행 중
발굴조사는 지금도 진행 중
조사 시기 주요 내용
1975~1976 연못 및 주변 건물지 발굴
1978 안압지 발굴조사보고서 출판
2012·2014 동궁과 월지 Ⅰ·Ⅱ 공개
2020 동궁과 월지 Ⅲ 공개

물은 어떻게 흘러들었나

연못으로 들어오는 물은 북동쪽 입수구를 통해 유입됩니다. 거친 바닥을 지나며 불순물을 걸러내는 수로 시설인 '용연'을 거쳐 폭포처럼 떨어지게 설계됐는데, 이는 당시 고도의 조경 기술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서쪽과 남쪽의 직선 석축, 북쪽과 동쪽의 곡선 조성, 인공 산과 섬 배치까지 종합하면 월지는 단순한 연못이 아니라 물의 흐름까지 계산한 정원 시설이었습니다.

답사 전에 확인할 것

이곳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경주 월성의 별궁터입니다. 남서쪽에 경주 월성이 붙어 있고, 북동쪽으로는 경주 황룡사지로 이어지는 임해로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 주변에서는 회랑지를 비롯해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됐고,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한 서쪽 못가 건물터 5곳 중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경주 월성 별궁터
  • 검색 팁: '안압지'와 '동궁과 월지' 두 명칭을 함께 검색
  • 인접 유적: 경주 월성, 경주 황룡사지
  • 복원 범위: 서쪽 못가 건물터 5곳 중 3곳과 연못

Q. 안압지와 동궁과 월지는 다른 곳인가요?

같은 곳입니다. 2011년 7월에 명칭이 '경주 동궁과 월지'로 변경됐을 뿐, 위치와 유적은 동일합니다.

Q. 이름이 바뀐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요?

1975년 발굴 조사 중 '월지'라고 새겨진 토기 파편이 발견되면서 신라 시대 본래 명칭이 확인됐고, 이후 공식 명칭 변경으로 이어졌습니다.

Q. 태자의 거처는 어디였나요?

최근 발굴로 월지 동편에서 태자의 독립적 거처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됐습니다. 기존에 동궁으로 알려졌던 서측 건물군은 왕이 사용하거나 국가 의례를 행하던 공간으로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Q. 발굴은 아직도 진행 중인가요?

2007년 중장기 계획 수립 이후 조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20년 《경주 동궁과 월지 Ⅲ》 발표 당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20년부터 '나'지구 발굴조사를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